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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그 놈은 맛있었다

어랍쇼 2004. 8. 12. 23:46

그 놈은 맛있었다



나는 오늘 회사에서 일찍 퇴근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냥 퇴근이 아니라 영원한 퇴근이다.

이번 여름 신제품개발 프로젝트로 회사에 큰 손실을 입힌 탓이었다.

변두리 원룸자취방에 쳐진 어깨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앉혔다.

소파도 주인의 무거움을 아는지 여느때보다 깊이 나를 안아주었다.

열대야때마다 나의 갈증을 적셔주던 냉장고는 오히려 슬금슬금 나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일어나 냉장고 앞으로 다가섰다. 냉동고를 열었다.

"빌어먹을!"

냉동고안에는 내 따귀를 때린 '그 놈'이 꼬리를 내린 채 들어있었다.


나는 배스킨라빈스 신제품개발부 연구원이었다.

본사는 각 대륙과 인종, 국가에 맞는 트랜드에 맞춰 신제품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나 또한 브랜드파워만을 믿은 채 무조건적인 문어발식 확장을 꾀하기보단

각 지사의 창의성과 자생력을 존중해주는 본사의 경영스타일이 맘에 들었다.

한국의 고급 아이스크림 시장에서 배스킨라빈스가 62%를 점유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경영전략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작년 겨울부터 네티즌들을 대상으로한 설문조사와 작년 여름 식품소비패턴 데이터분석를 통해

내부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그 놈'을 내가 제안했고 팀장이 되어 개발을 강행했었다.


'그 놈'은 납량특집같은 여름철 엽기 아이스크림케익이었다.

외우기는 커녕 보고도 읽기 힘들던 기존의 이름과도 다르게 이름도 '토막살인의 추억'으로 지었다.

사람 손모가지모양의 아이스크림 베이스에 붉디붉은 체리시럽으로 잘린 부분에 데코레이션처리하여

리얼함을 살렸으며, 손톱은 아몬드로 붙였고, 잘라먹을 수 있도록 프라스틱칼도 전기톱모양으로 만들어 주었다.

내 스스로도 너무나도 의기양양했었다.

적어도 트랜드를 읽을 줄 아는 한국의 젊은 소비자라면 안 먹고는 못 배길 상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만의 착각이었다.

시장에 나오자마자 각종 매스컴과 네티즌들은 일제히 휴머니즘 상실을 들먹이며 '그 놈'으로 내 목을 졸라댔다.

결국 회사에서는 회사 이미지 훼손을 염려하여 전량 회수처리했으며,

나를 회사에서 잘라버린 것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나는 냉동고가 무덤인양 움크리고 있던 '그 놈'을 꺼내어 체리시럽을 핥았다.

피같은 내 청춘은 이제 끝이었다.



2004. 8. 12. 어랍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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